소련 공산당 20차 당대외이후를 계기로 의구심은 강해졌다.
1954-56년 사이 중공과 소공은 대외정책(평화공존)에서 내정(경제구조조정)까지 비교적 일치된 입장이었다. 중공이 소공의 지도적 입장을 따랐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중공과 소공의 입장을 따르지 않았다. 1955년 1월 31일 조선공산당의 당과 국가의 현단계 기본임무에 관한 지침성 문건에는, 모스크바의 방침인 ‘평화와 통일을 위해 노력한다’는 표현이 없었다. 그 대신 ‘남조선 인민의 해방’, ‘’남조선의 친미 친일 지주집단을 박살내자’는 구호가 채택되었다.
김일성은 모스크바의 새로운 정책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시했다.
“우리는 일방적으로 모스크바를 따라하던 방식을 수정해야 한다. 소련은 미국과 직접 전투를 진행하지 않았고, 미국과 평화공존을 모색했을 수도 있지만, 미국은 우리의 남쪽을 점령했으며 이것은 모든 조선인민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420, 주170, 서대숙, 북한의 영도자 김일성, pp.125-126)
1956년 초 조선노동당 강령초안은 이런 경향을 계속해서 반영하고 있었다. 소련대사관은 수정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420, 주171, ЦХСД, ф.5, оп.28, д.410, лл.22-25)
중국과 북한의 관계는 전쟁중부터도 별로 좋지 않았다. 소련 외교부의 보고서는 중국과 조선의 관계가 비정상적이라고 평가했다. ‘지원군 사령부가 평양에서 수십 km 떨어진 지역에 위치하고 주거 조건도 매우 열악하며 매우 적은 수의 조선 지도자 동지들이 방문을 하고 있다. 평양의 전쟁 박물관에는 12개의 전람실이 있는데 중국 지원군을 위한 것은 겨우 한개의 전람실 뿐이며, 그 외 모든 전람실에는 인민군의 작전이 지원군과 무관하다고 설명되어 있다’
(421-422, 션즈화가 말한 소련 외교부의 평가가 시기적으로 언제인지는 추가적인 확인이 필요하다.)
중국의 북한에 대한 태도로 매우 강경했다.
1952년 중국정부는 조선주재 중국대사를 불러 들인후 1955년 1월까지 다시 신임대사를 파견하지 않았으며, 중국조재 조선대사관에서 개초된 연회에서 저우언라이는 북한대표와 거의 대화를 하지 않았다.
1952년부터 1955년까지 중국이 북한주재대사를 파견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가장 많은 협조가 필요한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북한에 대사를 파견하지 않았다. 그리고 중국주재 북한대사도 무시했다. 당시는 연안파 숙청이 이루어지는 시기도 아니었다.
(1952년부터 1955년까지 중국과 북한의 관계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는가는 이후 북중관계 연구에 중요할 것이다)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중국은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려했고 북한은 이에 저항했다는 것이다. 중국은 한국전쟁에 참전하는 대가로 스탈린으로부터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인정받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북한은 이에 저항했고 이것이 북중간 관계악화로 표현되었다는 가설 수립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