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로 쌓아올린 허상의 기쁨, 영화 [종이 달] - by Tiziano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아직 뭘 모르는 자이다.

하지만 역설되게도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다고 말하는 자 역시 뭘 모르는 자이다.


영화 [종이 달]은 고객의 돈을 훔쳐 행복으로의 도피를 했던 한 여자의 나날을 그렸다.


은행 계약직 영업사원인 리카는 특유의 차분한 성품과 단아한 외모로 회사와 고객 모두의 신뢰를 쌓고 있다.

사회에서 꽤 잘 나가는 남편과 단 둘이 지내는데 딱히 결핍은 있어보이지 않는다. 남편은 리카에게 자상하게 대해주고 리카 역시 남편에게 상냥해보인다. 

하지만 둘은 딱히 깊은 내면을 공유하는 것 같지도 않다.


1995년, 일본의 버블경제는 엄청난 호황을 누린 후에 서서히 사그라져가고 있었고 그 덕에 현금부자, 부동산 부자인 노인들이 가득했다.

은행을 비롯한 각 금융사는 이들의 돈을 유치하기 위해서 영업사원들을 고용했고 이들은 발로 뛰는 영업을 해가면서 노인들의 돈을 예금상품으로 가입시킨다.

리카는 어떤 노인의 집에 들어갔다가 우연찮게 노인의 손자와 마주치게 되고, 이후 퇴근길에서도 자주 마주친다.


균열이 유혹을 불러오는 것일까 유혹이 균열을 만드는 것일까?

이십대 초반의 대학생인 노인의 손자와 리카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깊은 관계로 빠져든다.

일상에서 갑작스럽게 생겨난 비밀은 또 다른 비밀을 불러오는 법이다.

내연남의 등장이 리카에게 무슨 비현실적인 자신감을 심어준 것일까?

백화점에 가서 화장품을 사던 리카는 1만엔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대수롭지 않은 생각으로 고객의 예금액에서 1만엔을 빼서 쓴다. 

그 길로 바로 ATM에서 1만엔을 인출해 채워넣지만 이렇게 젖어든 가랑비는 점점 겉잡을 수 없게 리카의 욕망을 흠뻑 적셔간다.


자신의 내연남이 비싼 학비 때문에 빚더미에 앉아있다는 것을 알게 된 리카는 고객의 예금에 손을 댄다.

'나중에 채워 넣으면 되지 뭐, 어차피 2년짜리 예금이니까 그 안으로 채우면 되잖아.'

이렇게 시작된 거짓과 균열은 그녀를 점점 대담하게 만든다.

리카는 복사기를 사서 예금증서를 위조하고 은행의 서류를 조작해나간다.

한 번 생긴 균열을 채우기 위해서 치매증세가 있는 다른 고객의 예금에도 손을 대게 되면서 도둑질한 금액은 눈덩이처럼 커져만 간다.


어차피 내 것이 아닌 돈, 훔친 돈, 얼마 가지 못해 탄로나버릴 거짓말들

그런 것들로 쌓아올린 행복이 과연 진짜일까?

최고급 호텔에서 내연남과 현실도피를 즐기고 쇼핑을 하며 그에게 고급 맨션을 얻어주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렇게 즐기는 와중에도 어쩔 수 없는 불안감은 그녀를 잠식한다.

'어차피 다 거짓이야, 나는 감당하지 못해, 지금 즐거워도 결국 머지않아 다 끝날거야.'

그런 생각이 들수록 더욱 대담하게 고객의 돈을 훔쳐 가짜 행복으로 도피를 한다.


은행에서는 점점 그녀의 행동을 수상하게 여기고 눈치 빠른 선임은 그녀가 맡았던 계약건과 예금내역을 조사해본다.


간만에 몰입도와 긴장감 고조가 최고치인 영화를 봤다.

이 영화에서는 그 누구도 큰 소리를 내지 않지만 시종일관 불안감과 허무함의 절규를 내지르는 미야자와 리에의 눈빛연기가 압권이다.

자신을 향한 어린 내연남의 감정이 결국 돈이 마르면 증발해버릴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가짜행복을 쫓을 수 밖에 없는 그녀의 내면연기가 일품이다.


우리는 얼마짜리 행복을 누리고 있을까?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이 영화를 보고나서 두려워졌다.

나조차도 모르고 있었던 일상의 작은 균열 사이로, 어느 날 갑자기 어마어마한 감정의 홍수가 쏟아져 나올 수도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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