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서 있는 자리가 막다른 골목이라고 느꼈던 적이 있었다. 어찌어찌해서 먹고살기 위해 찾아들어오긴 했으나 한 번도 내 몸에 딱 맞는 옷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럭저럭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일하고 또 일하다보니 이제는 어느 정도는 익숙해져 어지간한 문제는 해결할 수 있지 싶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일이 꼬였다. 상황은 계속 악화됐고 난 날마다 내 능력치의 한계를 경험하며 하루하루를 정말 위태위태하게 보내고 있었다. 일은 끝이 없어보였다.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는 있을까? 그때 절절하게 느꼈다. 막다른 골목에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자의 심정이 무엇인지.. 여기서 나가떨어지면 더 비참해질 거라는, 경험칙에 근거한 준엄한 목소리로 나 자신을 겨우 추스려서 견디고 또 견뎠다. 그렇게 난 그 막다른 골목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난 스스로를 대견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그래.. 그래도 이 정도면 잘 한 거야..'
그러나 난 그로부터 얼마 후 자괴감을 느껴야 했다. 내가 그토록 어렵게 빠져나온 상황을 너무 쉽게 해결하고 나오는 사람을 본 것이었다. 심지어 그 사람은 나보다 나이도 어리고 경력도 짧았다. 난 쿨해지려 노력했다. 뭐 그럴수도 있지.. 그러나 그 사람을 칭찬하다가 내 눈치를 보는 사람들을 봤을 때 난 무너지고 말았다. 난 굳은 표정이 되어 서둘러 회사를 나섰다.
그때 그 일은 내게 상처가 됐지만 그래도 위로를 받을 수 있었던 건 그런 사람이 나 뿐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을 때였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동료는 어렵사리 털어놓은 내 사연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자기도 너무 쪽이 팔린 나머지 죽고 싶어 겨울에 한강 다리를 건넌 적도 있다며 나에게 위로주를 건넸다.
그때 내가 어쩌다 이 길로 들어서게 됐을까 생각을 해보게 됐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 진실 하나.. 그것은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참 모르고 살았다는 것이었다. 난 왜 그렇게 살았을까?
주변을 둘러보니 나와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때 알게 된 또 하나의 진실..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해 알고 사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앞서 말한.. 내게 굴욕을 안겨준 그 친구는 여러 모로 타고난 친구였다. 아무리 경험이 많고 노력을 많이 해도 뛰어넘기 어려운 벽을 느끼게 하는.. 그로부터 얼마 후 난 내게도 그 친구처럼 타고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나 곧 난감해졌다. 이제와서 직업을 바꾼다는 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뒤늦은 깨달음은 내게 고민을 안겨 주었다. 이것을 현실 속에서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의 문제가 남았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현재 하고 있는 일에 투입하고나면 남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때부터 조금씩 조금씩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 인생에 대한 책임은 내게 있다. 난 누구에게도 그 책임을 돌릴 생각이 없다. 그러나 미숙했던 시절 이런 것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고 무조건 열심히만 하라는 얘길 들으며 성장했었던 것은 틀림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은 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도 아니다. 자기자신에 대해 생각해보지도 못한 채 경쟁에 내몰려야 하는 것은 엄연한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인생은 육상경기가 아니다. 육상경기에서 선수들은 모두 같은 출발선에 선다. 그러나 인생에서는 분야별로 출발점이 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타고난 재능만으로 남보다 수십 미터 앞선 지점에 서기도 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인생에서는 열심히 달리기 전 자기자신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냥 열심히 달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 달리기 전 생각을 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자기자신에 대해 알고 뛰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언젠가 막다른 골목에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봐야 하는 상황이 도래할 수 있다.
언젠가 대기업에 취업한 지 1년이 안 돼 퇴사하는 신입의 비율이 50%에 육박한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렇게 취업하기가 어렵다고 하는 요즘 그들이 사표를 써던진 까닭은 무엇일까? 그들 역시 나와 비슷한 한계에 부딪치고 깨달음을 얻었던 것은 아닐까?
살아가는 데에는 그리 많은 재주가 필요하지 않다. 남들보다 비교우위에 있는 재주 한 두 가지만 있으면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 나는 종종 그것을 충분히 활용하는 것만으로 평균 이상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본다. 그때마다 생각한다. 어렸을 때 윤리 교과서에서 본 그 말.. 그리스의 철학자인 소크라테스의 명언 '너 자신을 알라'는 그 말은 뜻밖에도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닌 현실을 사는 우리가 되새겨야 할 실제적인 인생의 교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