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미처 몰랐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날이 개는 것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를...
그저 돈 몇 푼 벌어보겠다고 도심 속 좁은 공간에 송곳처럼 꽂혀 있는 건물들 사이를 헤매고 다닐 때 난 계절을 느끼지 못했었다. 바쁘게 뭔가를 하다보면 무더위가 찾아오고 프로젝트 하나를 끝내고 한숨을 돌릴 때가 되서야 떨어지는 낙엽을 보는 식이었다. 난 그렇게 살았다.
그러다 몇 년 전 자연이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왔다. 베란다 바깥으로 숲이 보였다. 단지 내 조경이 잘 되어 있기도 했지만 아파트 맞은 편 야산에 계절마다 꽃이 피고 단풍이 들었다. 난 이곳에 와서야 비로소 계절을 느끼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일어나 창 밖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난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그동안 내가 보지 못했던 삶이 거기 있었다. 그것은 마치 다락방에서 뽀얗게 먼지가 쌓인 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낯설면서도 기분좋은 경험이었다. 난 내가 살아야 할 삶을 살지 못하고 엄한 곳에서 삽질을 하고 살았던 것은 아닐까?
(출처 : 네이버 영화)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한 청춘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녀의 이름은 혜원(김태리분).. 그녀 역시 뭐 하나 뜻대로 되는 게 없는 이 시대의 난감한 청춘들 중 하나다.
도시에서 알바를 하며 교직원 임용고시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가슴 속에 돌덩이가 들어앉은 듯 마음이 무겁다. 그래도 이렇게 돌아올 곳이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어머니가 그녀에게 남겨준 시골집은 예전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오랜만에 집안 이곳저곳을 둘러보는데 배고픔이 몰려온다. 쌀독에 약간의 쌀이 있을 뿐 아무것도 없다. 도시라면 망연자실했겠지만 이곳은 다르다. 그녀는 얼어붙은 텃밭에서 배추 한 포기와 파 한뿌리를 뽑아와 된장국을 끓인다. 도시에서 그녀는 항상 배가 고팠다.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던 그녀의 주메뉴는 팔다남은 도시락이었다. 그것은 상하기 일쑤였고 무엇보다도 온기가 없었다. 이제 그녀는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쌀밥과 배추 된장국을 마주하고 있다. 그녀는 간만의 성찬을 즐긴다.
그렇게 첫끼니를 때우고 이튿날이 되자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한다. 이곳은 역시 작은 시골 동네였다. 친구 은숙과 재하가 찾아오고 고모가 굴뚝에 연기가 나는 것을 보고 쫓아온다. 이곳에서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엄마 품 같은 자연과 좋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는 서서히 이곳에 다시 동화된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녀는 헷갈리기 시작한다. 그녀는 이곳으로 도망쳐온 것일까? 돌아온 것일까?
(출처 : 네이버 영화)
한국사회는 극심한 경쟁사회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입신양명의 프레임 속에서 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일부 사람들만 받는 대학교육을 필수라고 생각하고 대학에 진학하는데에 청소년기를 다 바친다. 모두가 한 방향으로 달리는 사회에서 달리지 않거나 다른 방향으로 가면 '비정상'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게 된다. 분위기 따라, 다수가 선택하는 것을 나도 선택하는 것이 당연시 되는 사회에서 살다보면 홀로 다른 길을 가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게 된다. 왠지 나 혼자만 루저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엄마가 남겨준 시골집에서 혜원은 훗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시간을 보낸다. 맛난 음식을 해서 은숙과 재하를 불러다가 파티를 하고 술을 담가 나누어 마시기도 한다. 그녀는 몸에 잘 맞는 옷을 입고도 그 옷이 자기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소녀와도 같았다. 도시에서 끝내지 못한 시험과 연애가 아직도 그녀에게 자격지심을 심어주고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이곳에서의 생활이 너무 좋았다. 봄이 오는 툇마루에 앉아 그녀는 중얼거린다.
"긴 겨울만 보내고 가기엔 너무 억울하잖아?"
그녀는 과연 이곳에 정착할 수 있을까?
우리는 사는 동안 뭔가 대단한 일을 해야 한다는, 최소한 남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무언가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사는 경우가 많다. 우리 사회는 대놓고 그러지는 않더라도 뭔가 뚜렷한 성취를 하지 못한 사람을 은근히 루저 취급한다. 이 영화는 이런 시선을 향하여 조용히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올리라고 말한다. 그렇다. 꼭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 시쳇말로 지 꼴리는대로 사는 삶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의 코어씬 하나를 스포일러로 시전하고 글을 맺으려 한다. 혜원이 가지고 있는 엄마와의 추억 한 토막이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따뜻한 봄날 혜원은 엄마와 함께 평상에 앉아 토마토를 먹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 죽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엄마는 먹고 남은 꼬다리를 밭에 던진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저렇게 던져놔도 이듬해 토마토가 열리더라. 신기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