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 상징이 된 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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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 : 노무현 사료관)

BC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가 암살 당했다. 그의 죽음은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3월 18일에 파르티아 원정을 떠날 예정이었다고 한다. 당시 로마인들은 그가 로마의 뼈아픈 패배를 설욕해주리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런 그가 벌건 대낮에 브루투스를 비롯한 암살자들 14명에 둘러싸여 죽음을 맞이했다. 그들은 공화주의자들이었고 카이사르가 파르티아 원정을 끝내고 개선하면 로마의 황제가 되리라 믿고 있었다. 당시 로마인들은 카이사르라면 충분히 파르티아 원정에 성공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그래서 암살자들은 그 이전에 거사를 해치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자들은 카이사르만 제거하면 로마의 공화정을 지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죽음 이후 로마의 정국은 그들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로마는 대제국이 되어 있었고 공화정이라는 정체로는 효율적으로 통치할 수 없는 나라가 되어 있었다. 공화정에서 제정으로의 이행은 역사적인 흐름이었다. 그것은 카이사르 한 사람을 제거한다고 하여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흐름을 볼 줄 모르는 자들은 사람만 제거하면 된다고 착각하기 쉽다. 그들의 단견은 역사적인 흐름을 몇몇 사람의 책동으로 간주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비극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카이사르의 장례식 후 공개된 유언장에는 '옥타비아누스'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자식이 없었던 카이사르에 의해 후계자로 지목된 이 인물이 바로 로마의 초대황제인 아우구스투스다. 당시 그는 18세였다. 역사적인 흐름은 그 임무를 수행하던 인물이 갑자기 죽더라도 곧 다른 인물을 찾아낸다. 카이사르만 죽이면 제정으로의 이행을 막을 수 있을 거라는 공화주의자들의 생각은 완전한 착각이었다.

오히려 카이사르는 죽음 이후에 더 강력한 존재가 된다. 그는 카이사르파의 정치적 상징이 된다. 그리고 훗날 그의 이름은 로마 황제의 칭호가 된다. 암살자들은 카이사르의 후계자에 의해 복수의 제단에 제물로 바쳐진다.

6월 13일에 지방선거가 있었다. 선거는 민주당의 완승으로 끝이 났다. 이것은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야당의 근거 없는 심판론을 압도한 결과였다. 난 이 장면을 지켜보면서 노무현을 떠올렸다. 문재인 대통령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이름 '노무현'..

지금까지 한국의 주류였던 보수세력이 무던히도 미워했던 이름이다. 그들은 왜 그토록 이 상고 출신 대통령을 싫어했던 것일까?

2016년 나향욱이라는 자가 '민중은 개돼지'라는 망언을 해 파면된 일이 있었다. 그는 '완전한 평등사회는 없기 때문에 신분사회는 고착화되니 이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지금 이 시대에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는 자가 있나 싶지만 나는 이것이 그만의 생각은 아니라고 본다. 우리 사회의 지도층 중에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자들은 생각보다 많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후 이어진 정치인들의 망언들.. '레밍'이나 '밥하는 아줌마' 같은 말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생각이 나향욱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 사회는 1987년 노태우가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인 이후 직접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발전하는 과정 가운데 있다. 그 과정에서 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공직자들의 권한은 날로 커지고 있다. 나는 우리 사회의 지도층과 엘리트 중에 이를 달가워하지 않는 자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권한이 막강한 선출직에 오르려면 그들이 보기에 자신들보다 열등한 일반 대중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그들은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시장통에서 열심히 고개를 숙이고 다녔을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진화해가는 직접 민주주의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와중에 우리나라에는 매우 특이한 이력의 대통령이 탄생한다. 2002년에 있었던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는 득표율 48.9%로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서울 법대를 나와 대법관과 감사원 원장, 총리까지 역임한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엘리트 이회창에 비해 그의 이력은 초라했다. 부산상고 출신에 독학으로 사시를 패스했고 정치에 입문해서도 나름의 소신을 지키느라 무모한 도전과 실패를 거듭했던 그의 삶은 이회창의 화려한 이력과 매우 대조적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다른 정치인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자질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진정성'이었다. 정치인들의 위선에 질린 사람들은 그에게 기대를 품기 시작했고 이것이 그를 최고권력자의 자리로 밀어올리게 된다.

사람들은 열광했지만 그와 함께 정치를 해야 할 지도층과 엘리트들 중 상당수는 그의 등극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국회의원 정도는 모르지만 상고 출신의 인권변호사를 대통령으로 모시는 것은 엘리트의 자존심상 도저히 할 짓이 못된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그는 집권기간 내내 그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들과 맞서야 했다. 이것은 단순히 이념과 정책의 차이로 벌어진 일은 아니었다.

나는 그의 집권이 우리나라의 직접 민주주의가 한 단계 다른 차원으로 올라선 결과였다고 생각한다. 쓸만한 대권 후보를 발견한 대중은 이미 그를 최고권력자로 만들기에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87년 체제가 출범한 이후 직접 민주주의는 역사의 흐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대한민국의 주류는 이를 인정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집권 초기부터 그를 끌어내릴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그러다 탄핵이 이루어졌고 대중은 총선을 통해 이를 심판했다. 그는 국민의 힘으로 권좌를 보전할수 있었지만 그의 권력기반은 취약했다. 그가 이렇다 할 성과를 내놓지 못하자 그의 인기도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그렇게 그는 임기를 마쳤지만 집권한 보수의 주류는 그를 그냥 놔둘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그를 만신창이로 만들고자 했다. 그를 포토라인에 세우고 그의 정치적 자산인 진정성과 도덕성을 난도질 하여 그와 그의 동조자들이 다시는 집권을 꿈꾸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목적을 이루기 전 그는 죽음을 택한다.

아마도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명박은 이 사건의 의미를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모자란 지성으로는 죽은 노무현이 상징이 될 수 있고 그 상징성이 그의 몰락을 가져올 힘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직접 민주주의라는 도도한 역사의 흐름.. 그것이 노무현의 집권을 가능케 했고 노무현이 없더라도 그 수행자를 찾아낼 것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난 9년 동안 우리나라의 주류였던 보수는 이 역사적 흐름이 멈춰버렸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완전한 착각이었다. 이 도도한 힘은 문재인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를 최고권력자의 자리로 밀어올렸다.

오늘 뉴스를 보니 승리의 환호성과 참패로 인한 탄식의 소리가 동시에 들려온다. 선거 전문가들은 이 선거가 사실 문재인과 홍준표의 대결이었고 문재인의 완승으로 끝난 거라고 한다. 그러나 내 눈에는 죽어서 상징이 된 한 사내의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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