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사회, 그리고 블록체인
여러분들은 사회를 뭐라 생각하십니까? 돈 있는 사람들이 움직이는 곳?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들이 이끌어 나가는 곳? 아니면 정부, 국가라는 단체가 조종하는 곳?
위의 예시 중 본인의 생각에 하나라도 부합되는 것이 있다면 그러한 생각이 별로 좋은 것은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 우리가 알고 있는 사회는 어떻게 이뤄지고 있나?
‘Society’의 어원은 라틴어에서 유래했는데요. 라틴어로 ‘Societas’. 동료 및 같이 일하는 동업자들을 친근하게 일컫는 단어입니다. 여러분은 사회가 어떻게 움직인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 기관과 기업들, 정치인들을 포함한 공무원과 기업인들. 그리고 조성되는 그들만의 리그가 움직이는 것이 사회의 현실이라고 한정 지어 생각하기 쉬운 것 같습니다. 주변 사람들뿐만 아니라 미디어에서도 그렇게 묘사되곤 하죠. 우선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물어보실 수도 있습니다.
‘아니, 쟤네들이 움직이는 게 곧 나라 먹여 살리는 거지. 삼성이나 엘지 없어 봐. 우리나라 이미 죽었어.’
네? 과연 그럴까요? 여러분들은 정말 사회에서 쓸모가 없는 사람들인가요? 그들보다 자신의 영향력이 적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마 이런 반문을 했을 때,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으신 분들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구요? 우리는 세금도 내고 있고 국가라고 하는 존재가 하라고 하는 것들, 하지 말라고 하는 법이나 규칙들을 대부분은 착실히 이행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그 말인즉슨, 이 사회에서 우리도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다만 거시적으로 봤을 때는 보잘것없어 보일 뿐입니다.
다시 돌아가서, ‘Societas’는 ‘함께 어울리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함께 어우러져 조화롭게 살아가는 곳을 일컬어 ‘사회’라고 부르는 것이죠. 그렇다면 ‘함께’는 누구를 의미할까요? 아까 말씀드렸던 정부 고위층들과 기업인들에 한정되는 개념일까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을 겁니다. ‘우리’와 ‘함께’라는 개념은 비로소 ‘나’라는 존재가 있어야 성립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라는 사람들이 모여서 ‘우리’를 이루고 ‘우리’를 이루는 사람들이 모여 집단이 되며 사회라는 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겉보기엔 판단하기 쉬워 보이는 것도 때론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알지 못했던 가치들이 존재하기도 합니다.
수많은 ‘나’들이 모여 규칙을 정하고 그 규칙을 법제화시켜 법이 되어 우리의 삶 속에 스며드는 과정은 꽤 단순합니다. 그렇지만 그 단순함에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복지의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독일에서의 ‘사회’의 뜻은,
Gesellschaft : 동료, 사회, 한자리에 모인 사람들
영어로는 이익사회, 구성원의 자유 의지로 이해·계약 관계를 맺으며 이루어진 사회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개개인이 모여 동료가 되고 같은 목표로 한자리에 모이면 그게 사회가 되고 기업이 되는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큰 움직임을 보여주는 기업들도 개인들이 움직이는 것임을 우리는 자각해야 합니다. 사회는 기업들과 공무원들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개인인 ‘나’들이 움직이는 것임을 말이죠.
2.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요?
우리는 세금을 냅니다. 대한민국에 살든 어디에 살든 국가라는 개념의 단체에 속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세금을 냅니다. 우리가 땀 흘려 번 돈, 우리 부모님이 땀 흘려 번 돈을 우리가 주는 개념입니다.
‘우리가 이만큼 줄게. 힘든 사람들, 필요한 곳에 잘 써줘.’
하는 개념으로 기관에 일정량을 지급합니다. 그게 세금의 원래 방식입니다. 국민들이 필요한 곳에 쓰라고 주는 것. 근데 우리의 세금은 어디에 쓰이고 있나요? 우리가 쓰라고 한 필요한 곳에 진정 쓰이고 있는 것이 맞나요? 우리가 정녕 공무원들이 자기들 명품백과 비행깃값 하라고 세금을 준 것인가요? 하이힐이 보도블럭에 끼여 다칠까 봐 인도의 보도블록을 갈아치우라고요? 청원 사이트 만들어 놓고 귀 닫으라고 말입니까? 탈세하고 청탁하라고 우리의 권리를 빌려준 겁니까?
우리는 세금이 어디에 쓰이는지 어디에 쓰여야 할지 알 수도 결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저 대리로 정책 결정을 하는 사람들끼리 정하는 것이니까요. 투표권을 행사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일임해버립니다.
‘네가 나 뽑았잖아.’
물론, 민주주의가 최선의 선택인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권리가 권리답게 쓰이고 있지 않은 현실이 안타깝고 바꿀 수 있는 부분을 바꿔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에게 선택권이 있는, 블록체인이 좋습니다. 물론 항상 예외는 있습니다만 적어도 중앙화된 시스템보다야 독점은 덜하죠. DPoS의 지분 위임 방식을 저는 그다지 긍정하지 않지만, 일종의 타협을 한, 지금으로서는 효율적으로 생태계 유지를 가능케하는 시스템이라고 생각합니다. 국회의원으로 비유되는 증인 위치를 우리가 결정할 수 있으니까요. 신뢰도가 낮아지거나 커뮤니티에서의 기여도가 낮으면 국회의원을 갈아치워 버릴 수 있다는 것이죠. 여기서도 문제점이 있지만 적어도 우리가 권리를 행사할 기회들은 ‘항상’ 존재한다는 것이 블록체인의 큰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당한 보상을 받으려면 정당한 생산력을 제공해야겠죠. PoW의 방식도 마찬가지로, 커뮤니티에 직접 제안하고 바꿀 수 있는 가능성과 희망이 항상 존재합니다.
개인심리학에 이런 개념이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이 공동체의 이익이 되도록 사회와 조화롭게 살아가라는. 이런 개념을 주장해서 아들러라는 사람은 공동체의 개념을 중시한다고 비판을 많이 받아왔습니다. 그래도 저는 이 개념을 좋아합니다. 개인주의자가 이기주의자로 변질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펜스인 것 같거든요. 본질적으로, 내 행동이 공동체에 기여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심어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시대에서 내가 하는 선택과 결정들이 어떤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 내가 속한 곳에서의 공헌을 한다고 생각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실제로 어떤 걸 기여하고 있어도 내가 하고 있지는 않으니까요.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번다고 하는 속담이 여기서 쓰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개인으로서 자신의 삶에서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타인과 자신을 분리해서 보아야 한다는 개념도 주장합니다. 타인의 과제와 내 과제의 분리의 개념인데요, 이 또한 정확히 우리 사회에 필요한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 '나'라는 주체를 잊어버림과 동시에 사회라고 생각하는 것에 억눌려 살아오고 필요 이상의 남의 눈치를 보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요.
내가 존재해야 사회가 존재하고 내가 의견을 제시하면 합의가 되어 법이 되는 것인데 오히려 지금은 반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나라는 중요한 ‘개인’들의 권리는 묻히고 ‘사회’라는 개념이 우리를 압박하는 꼴이죠.
이제는 법과 규칙들이 우리를 억압한다고 생각을 해야 할 때입니다. 그래야 바꿀 수 있고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해보면, 이 사회에서 내가 직접 뭔가를 바꿨다고 하는 것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사회 속에서 내가 살아가지만, 오히려 끌려가고 있는 형국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네, 우리는 우리가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은 지가 오래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우리의 권리를 양도함으로써 또는 잠시 빌려줌으로써 우리 자신의 본질적인 가치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저는 블록체인의 가치가 한 줄기 빛이 될 수 있을 거라 믿고 설령 내가 원하던 것이 아니라 해도 후회하지 않게 지금, 이 순간을 즐기려고 합니다.
3. 마지막으로
대중들이 멍청하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자기들끼리 정하고 돈 놓고 돈 먹기 하니까 자기들만 알 수밖에 없죠. 언론은 이미 언론이 아니고 미디어는 뭐 때문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신들 손에서 개인을 넘어선 집단들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는 사안들을 결정하니 우스워 보일 수도 있죠. 그래서 탈중앙을 외치는 사람들이 미움을 받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약간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그 좁은 틈을 향해 나아가보고 싶습니다. 문제점을 찾아 극복하고 혹시나 이쪽으로도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하며 나아가보고 싶습니다. 탈중앙화니 뭐니 저는 그런 것보다 희망이 생겼다는 것이 반갑습니다.
‘바뀔 수도 있겠다.’
‘우리가 뭔가를 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저는 무모한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아슬아슬한 절벽 위의 다리에 서서 낯선 바람과 맞서고 있습니다. 언젠가 건너가 있을 저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오늘도 도전하고 있습니다.
한번쯤은 생각해봐야 합니다. 바꾸는 게 귀찮아서, 현실만을 보면서 가만히 있으려는 것은 아닌지. 조금씩 좁은 틈으로 물은 새고 있을 거라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