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리뷰: 미스테리 속에서도 삶의 의미는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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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강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속의 인용대사는 제 기억에 근거한 대사이기 때문에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Act1 이제 메타포의 진실을 말해봐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택배 일을 하는 종수는 어느 날 행사장 앞에서 해미라는 여자를 만나게 된다. 해미와 종수는 어릴 적 동네친구였는데, 해미는 종수를 기억하는 반면에 종수는 해미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 종수에게 해미는 술이나 한 잔하자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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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에서 해미는 종수에게 온갖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자신은 팬터마임을 해서 귤이 없어도 귤을 항상 먹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귤이 없는데 있는 것처럼 느껴지려면 ‘귤이 없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면 된다’고 말한다. 그런가하면 아프리카의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 이야기를 한다. 리틀 헝거는 그냥 배고픈 사람을 의미하고 그레이트 헝거는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을 의미’한단다. 또 자신이 곧 아프리카에 가게 되는데 집을 비우는 동안 고양이를 잠시 돌봐달라고 부탁한다. 단 고양이를 종수의 집으로 데려가서 키우는 것이 아닌, 해미의 집에서 직접 돌보는 것으로. 이유인즉슨 해미가 키우는 고양이가 낯을 많이 가리기 때문이었다. 종수는 그런 해미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해미의 집으로 찾아가게 된다.

해미의 집에서 종수는 특이한 부분을 발견한다. 해미가 키우는 고양이의 이름은 ‘보일’인데 보일이를 아무리 불러도 고양이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종수는 해미에게 고양이도 판토마임이냐고 묻지만 해미는 고양이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답할 뿐이었다.

해미의 방은 영화 속에 처음 등장할 때부터 빛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 북향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이런 해미의 방에도 빛이 들어오는 순간이 있다. 바로 햇빛이 남산타워의 유리벽에 반사되어 해미의 방을 향하는 순간이다. 아주 일순간이지만 말이다. 우연히 그날 종수는 단 둘이 해미와 있던 방에서 섹스를 하던 중, 그 빛을 운 좋게 목격하게 된다.

시간이 흘러 해미는 예정했던 대로 아프리카에 가게 되고 종수는 해미의 집에서 고양이에게 밥을 준다. 물론 해미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그날까지 고양이는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종수는 해미의 침대 밑에서 발견된 고양이의 분비물을 통해 고양이가 실존한다고 짐작할 뿐이었다. 그러는 한편 종수는 해미가 부재(不在)해 있는 동안 남산타워를 바라보며 자위행위를 하는 습관을 들인다. 남산타워에 빛이 들어오는 순간을 찰나의 희망이라는 극도의 쾌락으로 여겼는지, 하필 그 순간이 해미와 첫 섹스를 하던 순간이라 단순히 그것이 연상되어 자위를 하는 것인지는 영화 초반부에 명확하게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매일 그런 일상이 반복되던 중에 해미의 귀국소식이 들려온다. 공항에 마중나간 자리에는 벤이라는 낯선 인물이 해미와 함께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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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은 베일에 쌓여있는 남자다. 귀국 술자리에서 해미가 아프리카의 저물어가는 노을에 대한 추억을 언급하며 ‘나도 저 노을처럼 사라지고 싶다’라고 말할 때, 벤은 그저 그것이 흥미롭다는 듯이 웃는다. 그리고 이내 흐느껴 우는 해미를 보며 ‘나는 우는 사람을 보면 신기해요. 왜냐면 난 여태까지 울어본 적이 없거든’이라 대답한다. 종수는 그런 벤을 보며 위화감을 느낀다. 술자리가 끝나고 집에 돌아갈 때 이 위화감은 더욱 극대화된다. 벤의 자동차는 포르쉐, 종수의 자동차는 낡은 봉고트럭. 종수는 알 수 없는 패배감에 의해 해미에게 자신은 집이 멀다는 핑계를 대며 벤의 차를 타고 가라는 말을 우회적으로 표현한다. 한편 벤도 종수에게 호기심이 생겼는지 자신의 집에 종수를 초대하고 음식을 직접 만들어서 대접한다. 그러면서 벤은 자신의 옆에 있는 해미에게 이런 말을 한다.

음식은 내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 모양대로 만들 수 있어서 좋아. 그리고 먹을 수 있잖아. 나에게 바치는 제물이라고나 할까. 메타포 같은 거지. 메타포가 뭐냐고? 그건 종수씨한테 물어봐. 종수씨 소설가잖아.

그렇다. 극의 후반부에 좀 더 명확해지지만 벤에게 있어 음식뿐만 아니라 모든 제물의 대상은 메타포(은유)다. 벤과 종수가 처음 만난 날의 술자리에서, 종수가 벤의 직업을 물었을 때도 그는 그저 자신의 직업이 ‘그냥 노는 것’이라 말했었다. 그에게 있어 인생은 직유가 아니라 은유에 지나지 않는다. 직유하는 삶은 벤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가 해미의 눈물을 신기하게 쳐다봤듯이.

반면 종수에게 있어 인생은 메타포일 수 없다. 그는 글을 쓰는 학과인 문예창작과를 나왔지만 불우한 가정환경 때문에 전공과는 관련 없는 생계형 직업에 종사하며 살아간다. 하루하루 은유를 할 여유가 없다. 그리고 그건 그의 친구 해미도 마찬가지다. 극중에서 건조하게 나오는 종수와 달리 지속적으로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도 카드빚에 시달리며 행사를 뛰러 다니는 명백한 직유인이다. ‘나도 저 노을처럼 사라지고 싶다’라고 말할 때 이건 문장자체로 이미 직유법이긴 하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그 표현 자체를 진심으로 했다는 점이다. 멋있어 보이려고 표현한 말이 아니라 진짜로 노을처럼 사라지고 싶어서 그런 표현을 한 것이다.

그래서 해미는 메타포라는 개념자체를 알지 못해서 벤에게 그 의미를 물어본다. 그래서 종수는 메타포에 대한 질문의 화살이 자신에게 향했을 때 그에 대한 대답을 회피하고 화장실이라는 공간으로 도망친다. 이때까지만 해도 종수는 직유의 틀에 머물러 있는 청춘으로 묘사된다.

Act2 동시존재한다는 것

이제 영화는 중반부를 향해 달려간다. 도망쳐온 벤의 화장실에서 종수는 이상한 것들을 발견한다. 화장도구가 담긴 상자와 알 수 없는 액세서리가 바로 그것이다. 종수는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채 벤의 집을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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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얼마 뒤 종수의 파주 집에 해미가 벤과 함께 곧 방문하겠다는 연락이 갑작스럽게 들려온다. 집에서 키우는 소의 사육장을 정리하고 있었던 종수는 부랴부랴 그들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벤은 그날 종수의 집에서 종수와 해미에게 대마초를 권유하고 함께 대마초를 피운다. 이에 해미는 약의 기운에 취해 아프리카에서 배웠던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저물어가는 노을 아래에서 정열적으로 추다가 잠들어버린다. 그리고 해미가 그렇게 춤을 추다 지쳐 잠든 사이에 벤은 종수에게 자신의 취미를 공개한다.

나는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가 있어요. 두 달에 한 번 정도 페이스가 좋은 것 같아요. 네 물론 불법이죠. 마치 지금 나랑 종수씨가 대마초를 핀 것처럼요. 하지만 한국경찰은 그런 거 신경 안 써요. 정말 순식간에 타버리거든요. 제가 비도덕적인 걸 추구하는 건 아니에요. 저는 도덕성이 동시존재의 균형이라 생각해요. 그러니까 나는 파주에도 있고 반포에도 있어요. 그리고 서울에도 있고 아프리카에도 있죠. 그 둘의 균형이 필요하다는 거죠. 그 균형이 있어야만 동시존재가 가능해지는 거예요

한마디로 벤에게 있어 동시존재의 균형을 맞추는 일은 곧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행위이다. 그 행위를 함으로써 벤은 비로소 양자 간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사실 이번에 종수의 집에 온 이유가 비닐하우스를 태우기 위한 사전답사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태울 장소는 정했냐고 종수가 묻자, 이미 종수의 집 근처로 정해놨다고 대답한다. 영화는 이때부터 동시존재의 미스테리 속에서 종수가 혼란을 겪는 모습을 낱낱이 보여준다. 다음은 소품별로 동시존재를 나타내는 존재들을 대략적인 시간순서대로 나열한 것이다.

파주: 벤이 해미와 함께 종수의 집에 방문했을 때 처음 건낸 질문이 ‘이 이상한 소리는 뭐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파주라는 지정학적 위치에 의해 들려오는 대남방송이었다. 대남방송의 존재는 영화초반부에 종수의 집이 나왔을 때부터 어렴풋하게 들려오는 소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종수가 사는 파주에서는 대남방송이 이미 일상이기 때문에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는다. 종수에게 있어서 대남방송은 벤처럼 낯선 것이 아니라 일상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파주라는 땅 자체가 남과 북의 교집합 범위에 위치하는 동시성의 장소임을 나타낸다. 종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일상에서 동시성의 미스테리를 숱하게 겪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영화 속에서 태극기와 대남방송이 한 씬에 같이 등장하는 이유도 바로 그런 동시성의 의미가 내포되어있기 때문이다.

비닐하우스: 벤에게 비닐하우스 이야기를 들은 그날부터 종수는 자신의 집 근처에 있는 비닐하우스를 모두 돌며 방화여부를 매일같이 확인한다. 이때 종수는 자동차가 아니라 직접 발로 뛰어다니면서 방화여부를 확인하는데, 이 씬에서 뛰고 있는 종수의 위에 새떼가 하늘을 날고 있는 모습이 같이 잡힌다. 이 장면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때마침 시간이 흘러도 멀쩡한 비닐하우스를 보며 종수는 서서히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또 종수의 집을 방문했던 그날 이후로 해미에게서도 연락이 더 이상 오지 않는다. 종수가 먼저 전화를 걸어도 해미는 받지 않는다. 과연 벤이 말하는 비닐하우스는 정말 실물에 실존하는 비닐하우스를 의미하는 것일까. 이 모든 사태에 의구심이 드는 순간 종수는 직유의 세계에서 메타포를 향해 한걸음 발을 내딛는다. 벤이 말하는 비닐하우스는 사실 실존하는 직유의 비닐하우스가 아닐지도 모른다. 허상이라든지, 보이지 않는 추상세계 속의 비닐하우스를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바로 이때 직유 속에서 뛰는 종수 위에 나는 새떼의 메타포적 존재는 더욱 부각된다. 해미가 저물어가는 노을 아래에서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추기 직전, 판토마임으로 날아가는 새를 의미하는 손동작을 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 새떼는 메타포 그 자체임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한편 벤이 ‘두 달에 한 번 태운다’라고 기간까지 언급했음에도 비닐하우스가 타지 않았다는 것은 실존의 허상을 암시한다. 이제 영화 속에서 실존하는 객체는 역설적이게도 허상이 되는 동시성을 띠게 된다.

: 그렇게 종수가 실물의 허상을 인지했다는 걸 의미하는 장치는 종수의 집에서 키워지고 있었던 소를 통해 드러난다. 비닐하우스라는 실물의 허상을 어렴풋이 인지한 시점에서 종수는 실존의 존재인 소를 팔아넘긴다. 결국 소는 종수가 메타포의 세계를 인정했다는 첫 암시임을 나타내는 존재이며, 동시에 향후 연계되는 고양이의 존재를 더욱 부각시켜주는 증폭장치로서의 역할을 한다.

우물: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것의 본래 의미 자체에 의구심이 들기 시작한 종수의 이후 행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그중 하나는 바로 연락이 끊긴 해미의 행방을 찾는 것이다. 해미를 찾아다니면서 종수는 연락이 끊기기 직전 해미가 말했던 우물의 존재에 대해 생각한다. 종수는 그런 기억이 전혀 없는데 해미는 어렸을 적 자신이 우물에 빠졌을 때 종수가 자신을 구해줬다고 말한 것이다. 이에 종수는 마을사람과 해미의 가족들에게 우물의 존재에 대해 묻지만 그들은 그런 우물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고 대답한다. 반면 종수와 아주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종수의 어머니는 우물이 실제로 있었다고 답한다. 과연 우물은 실존하는 것인가, 아니면 해미가 지어낸 무의식의 메타포인가. 이 시점에서 우물의 존재는 그저 미스테리하기만 하다.

전화기: 신원불명의 알 수 없는 전화도 이 영화의 주된 장치 중 하나다. 극 초반부터 종수는 알 수 없는 사람으로부터 전화를 받지만, 그 사람은 종수가 전화를 받자마자 아무 대답 없이 항상 전화를 끊는다. 그러다가 극이 무르익을 무렵 그 사람의 정체가 공개된다. 오래전부터 종수의 가족과 헤어진 종수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잘 생각해보면 동시성을 지닌다. 우리는 매일 목소리를 공개안하다가 공개하는 종수의 어머니를 보며 그전부터 전화를 걸던 사람이 종수의 어머니라고 지레짐작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닐 수 있다. 여기에는 실제로 전화를 걸어왔던 사람이 종수의 어머니였을 가능성, 그전에 전화를 걸어온 사람과 종수의 어머니가 전혀 다른 인물일 가능성 두 가지가 동시존재한다. 이제 극의 미스테리는 더욱 가중되고 종수의 메타포 세상에 대한 열망과 분노는 더욱 쌓여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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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해미의 행방을 찾는 것 외에 종수가 본격적으로 시작한 행동은 수수께끼의 인물 벤을 추적하는 일이다. 종수는 벤의 포르쉐를 따라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쫓아다닌다. 그러던 어느날 벤은 자신의 집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종수를 불러내 집으로 초대한다. 거기에는 이전에 벤의 집을 방문했을 때 없었던 고양이 한 마리가 놓여 있었다. 생각하기에 따라 이 고양이는 해미가 말했던 고양이인 ‘보일’일지도 모르는 상황. 그리고 그게 맞다면 해미가 실종된 시점과 벤의 집에 고양이가 생긴 시점을 비교해봤을 때 비닐하우스 방화는 사실 비닐하우스가 아니라 다른 ‘무엇’일지도 모르는 상황.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이 시나리오 역시 종수가 자신의 메타포대로 해석하는 것일 가능성이 있다. 애초에 해미의 집에 보일이라는 고양이가 실제로 있는지 자체부터 불분명했으며, 벤의 집에 있는 고양이는 벤의 말대로 그냥 주워온 고양이일 수도 있다. 이 사실은 종수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메타포의 영역에 깊숙이 들어왔음을 암시한다.

손목시계: 손목시계는 종수의 메타포가 완성되는 장치이다. 벤의 집에 있는 화장실을 다시 들른 종수는 액세서리가 있던 서랍에 해미의 손목시계가 추가됐음을 발견한다. 이제 종수는 비닐하우스 방화가 메타포임을 간파하고 사실은 비닐하우스가 아니라 해미라는 사람을 태웠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해미의 손목시계도 알고 보면 극의 미스테리한 장치 중 하나다. 종수의 관점에서 정황상 손목시계는 벤이 해미를 살해했음을 알려주는 결정적 장치이지만, 애초에 그 손목시계는 영화 맨 처음에 경품으로 받은 소품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극중에서 종수가 해미의 행방을 찾아다니다가 해미의 행사장 동료를 만나게 되는데, 이 사람 역시 해미의 손목시계를 차고 있다. 그만큼 손목시계는 해미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수는 나름의 결론을 내린 뒤, 더 놀다가라는 벤의 만류에도 그의 집을 서둘러 빠져나간다.

Act3 미스테리 속에서도 삶의 의미는 있다

메타포 세계로의 완전한 입성. 여기서부터가 극의 후반부다. 마스터 키를 통해 해미의 집에 다시 들어간 종수는 남산타워를 바라보며 드디어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이 장면 전에 종수가 벤을 만났을 때 ‘저는 삶이 수수께끼 같아서 소설이 안 써진다’라고 대답한 바 있다. 실제로 해당 장면 전에 극중에서 종수가 소설을 쓰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손목시계 씬 이후의 종수는 소설을 막힘없이 써내려간다. 그가 소설을 쓰는 씬 이후에 바로 나오는 씬이 벤과 다른 여자(해미 이후의 비닐하우스로 암시되는)의 씬이라는 것도 주목할만한 점이다. 여기서 벤은 화장실 안에 있는 화장도구 상자를 이용해 여자의 입술을 그려준다. 음식이 먹기 좋게 만들어 자신에게 바치는 제물같다고 표현했던 그의 말처럼, 정성스럽게 여자를 가꾸어주는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이 모든 건 종수가 쓰는 소설의 묘사인냥, 종수가 소설을 쓰는 모습에서 절묘하게 벤이 여자의 입술을 그려주는 씬으로 전환된다. 뿐만 아니라 종수는 이제 없는 사람을 실존하게 만드는 메타포까지 갖추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동안의 자위행위에 해미는 등장하지 않았으나, 이 씬에서의 자위행위에는 해미의 환영이 보이는 것으로 묘사된다. 종수는 이제 메타포의 세계를 더 이상 회피하지 않고 그 세계에 당당히 입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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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종수가 실현한 메타포가 과연 벤의 메타포와 같은 종류의 메타포일까?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청춘의 분노’다. 칸 영화제로 인해 엠바고가 철저했던 와중에서도 이창동 감독은 이 영화의 주제가 ‘청춘들의 미스테리와 분노를 다룬 작품’이라 말했던 바 있다. Act1에서도 다루었듯이 해미와 종수 / 벤은 이질적인 관계다. 이 시대의 척박한 청춘을 나타내는 해미와 종수에게 메타포는 이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런 반면 벤은 메타포를 즐긴다. 종수는 그런 벤의 모습을 보며 ‘개츠비’같다고 말한다. 수수께끼에 둘러 쌓여 있지만 돈은 많은 모습을 보며 비유한 말일 것이다. 극의 흐름상 흐르는 말투로 미루어 보았을 때 결코 호감의 표시로 벤을 개츠비에 비유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비꼬는 것에 가깝다. 결국 종수의 메타포가 실현된 뒤에도 살아온 배경이 완전히 다른 둘은 서로 그 메타포의 세계가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

한편 종수와 아버지의 관계도 이 영화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중요한 분노의 요소다. 종수의 아버지는 분노조절장애자다. 종수의 어머니가 집을 나간 이유도, 종수가 그렇게 힘든 삶을 사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도 전부 아버지로부터 기인한다. 종수는 그런 아버지가 증오스럽다. 분노를 또 통제하지 못해서 아버지가 폭행죄로 재판을 받고 있을 때 잠시 아버지의 재판장에 들르지만, 아버지와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바로 시선을 회피하고 재판장을 나간다. 아버지의 변호사인 아버지의 친구는 종수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희 아버지가 학창시절에 늘 1등이었어. 성적말고 자존심 말이야. 그놈의 자존심 좀 버리라 그래도 그렇게 말을 안 들어. 내가 옛날에 강남땅 사놓으면 절대 후회 안한다고 했을 때도 자기는 그런 거 안 한다면서 성실하게 농사나 짓겠다고 파주 땅으로 갔지.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됐어? 너희 아버지 다 말아먹고 결국 이렇게 됐잖니.

이렇듯 극중에서 종수의 아버지는 한심하게 묘사되고, 또 실제로 종수도 아버지를 좋지 않게 여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버지다. 문예창작과를 나온 종수가 극중에서 처음 글을 쓰는 모습은 소설이 아닌 아버지의 선처를 바라는 글을 쓰는 것으로 연출된다. 아버지의 존재가 증오스럽지만 동시에 아버지이기 때문에 그를 동정하는 모습. 이 또한 일종의 동시존재성을 내포한다. 그리고 잠시 영화외적인 부분에서 말하자면 극중 종수와 아버지의 관계는 실제 이창동 감독과 아버지의 관계와 오버랩되는 모습이 있기도 하다. 실제 이창동 감독의 아버지는 이상주의좌파여서 굉장히 가난하게 자라났다는 일화가 있다. 삼수를 결심했을 때 아버지의 반대가 심하자 한때 자살을 생각했다는 일화도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일화다. 그러면 상식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종수와 이창동 감독은 아버지의 전철을 밟게 되는 것을 혐오하는 게 맞다. 그러나 심리학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자식은 부모의 모습을 따라가기 마련이다. 그게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는 아버지의 모습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실제 이창동 감독도 원래의 상식대로라면 이상주의좌파에 대한 반작용으로 극단적인 반공주의를 표출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나, 그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반대로 휴머니즘을 일관되게 노래한다. 뿐만 아니라 민주화, 산업화, 소외된 사람들을 일관적으로 조명하는 모습. 모두 그와 아버지의 관계를 생각하면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행보들이다.

종수도 마찬가지다. 소설가는 굶어죽기에 딱 좋은 직업으로 분류되지만 그는 소설가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세속적인 꿈을 거부한다. 그의 아버지가 강남땅은 사지 않고 극중에서 순수성으로 상징되는 농부의 자존심을 지켰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원래대로라면 가난의 원흉인 순수성과 자존심을 증오하는 종수의 심리상 종수는 소설가를 하지 않는 것이 이치에 맞다. 그러나 그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따라간다. 심지어 그가 가장 경계하는 아버지의 분노조절장애조차 따라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해미와 벤이 종수의 집에 들른 날, 종수가 벤과 해미를 향해 쌓아왔던 감정을 폭발하는 씬이 대표적인 예다.

나는 해미를 사랑해요.. 씨발 나는 해미를 사랑한다고!

너는 왜 사람들 앞에서 옷을 아무렇지도 않게 벗어? 그건 창녀들이나 하는 짓이야. 알아?

벤은 그런 종수의 반응을 보며 재밌다는 듯이 웃기만 했고, 해미는 크게 실망한 뒤 그 다음부터 종수와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와 같은 종수의 분노표출장면은 극의 마지막에 극대화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게 된다. 영화 초반부에 잠시 스쳐지나가듯이 종수가 아버지의 창고에서 칼을 들여다보는 모습이 나오는데, 이 모습이 극의 마지막에 종수가 칼로 벤을 살해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다. 아버지의 창고에서 발견한 칼은 아버지의 분노와 세속에 대한 저항성 그 자체를 표현하는 상징이며, 그 칼로 벤을 찔렀다는 것은 종수가 아버지의 그러한 상징성을 그대로 승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봤을 때 어쩌면 벤은 이 사회 자체를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청춘들의 분노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감정적일 수 있냐고 비웃는 냉소적인 이 사회 자체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마지막까지 여전히 미스테리하다. 벤이 냉소적인 이 사회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전부인 인물이었다면 진작에 미스테리가 걷히는 모습으로 영화가 끝나야 정상이다. 그러나 벤을 살해하고 불태운 뒤 종수가 자신의 차에 탑승했을 때, 차창은 뿌연 김이 서려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것으로 묘사된다. 이는 종수의 대척점인 벤을 ‘버닝’했음에도 불구하고 극의 미스테리가 풀리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한편 종수는 벤을 불태울 때 자신이 입고 있던 옷가지도 전부 태우고 나체의 모습이 된다. 눈물이라는 증거가 보이지 않으면 슬픈 것을 알 수 없다는 벤의 말처럼, 단순히 종수는 증거인멸을 위해 자신의 옷가지를 태운 것일까? 그렇게 보기에는 묘하게도 해미가 사라져가는 노을 앞에서 나체로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추는 모습이 오버랩된다. 극의 초반부에 해미가 말했듯이 리틀 헝거는 그냥 배고픈 사람을 의미하고 그레이트 헝거는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을 일컫는다. 이 영화는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동시성을 추구하며 미스테리 속에 삶의 의미를 부여한다. 해미가 메타포라는 의미 자체를 알지 못했음에도 직유를 통해 소멸로써(그게 벤에 의한 죽음 혹은 다른 이유에서든)그레이트 헝거라는 메타포를 실현했듯이, 벤에게 있어 삶의 의미는 다른 객체를 태우는 것임과 동시에 어쩌면 그 자신이 태워지길 바라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종수의 칼에 두 번째로 찔렸을 때 그가 오히려 종수를 끌어안으면서 죽음에 순응했다는 것이 이를 잘 암시해준다. 이런 맥락에서 봤을 때 이 영화는 삶이란 애초부터 미스테리이며, 그에 대한 메타포를 찾는 것은 각 개인에 달렸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걸 나타내주듯 극중에서 해미와 벤, 종수의 이상향은 서로 명확하게 다른 것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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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해미와 벤이 없어진 자리에 남은 건 종수의 메타포뿐이다. 종수는 해미의 마지막 모습처럼 나체인 상태로 앞을 나아간다. 차창은 뿌옇게 김이 서려서 앞이 제대로 보이지조차 않지만, 어쨌든 시동을 걸고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으로 이 영화는 끝을 맺는다. 그 끝이 실제로 일어난 파국이든, 종수의 소설 속에 진행되는 이야기든 앞으로 종수는 종수만의 메타포를 실현해 나가며 살 것이다. 마치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시대 청춘들이 미스테리로 점철된 이 세상에 나름의 고유한 삶의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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