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별 수 없는 삶이다. 그만하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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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블로그의 이웃은 누구나 한 번쯤은 읽어 보았을 것이고, 또 방문해보았을 정도로 유명하다. 아이를 위한 간식을 만들었던 이야기를 쓰기도 하고, 남편의 옷을 다리며 있었던 이야기, 최근에 다녀왔던 휴양림에 관한 것들까지 그녀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일주일에 한 번씩 정성스럽게 사진과 함께 포스팅한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숨 쉬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하루 일상을 담담하게 풀어낸 그녀의 이야기는 점차 사람들의 입김을 타고 많은 구독자를 끌어모았고, 심지어 출판사의 제안을 받아 책을 낼 정 유명세를 치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녀의 글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기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단지, 품질 좋은 사진을 얻기 위해 DSLR 조작법과 약간의 촬영 방법을 배웠고, 정성스러운 댓글을 달아 준 이웃과 구독자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일일이 답글을 달아주었다. 문구가 떠오르지 않는 사진에는 애써 설명함으로써 주위를 어지럽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진과 잘 어울리는 이야기를 혼잣말하듯 써 내려간 것이 아마추어 작가로서 그녀가 할 수 있었던 전부였다.

그러던 사이에 블로그를 찾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었고, 유명세만큼 미치지 못하고 반비례하는 소통에서 한계와 취약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에는 몇 되지 않던 구독자와 댓글에 반응하기란 수월하지만 양과 수가 늘어날 때는 그 누구도 감당하지 못할 것 아니었겠는가. 마치 유명 연예인이라도 된 듯한 느낌을 받았던 구독자 중 누군가는 이를 언짢아했고, 그 수는 미미하지만 역시 늘어나기 시작했다. 때문에 괜한 트집을 잡거나 날 선 지적질을 하는 댓글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는데. 급기야 그녀는 모든 댓글을 닫아버리거나 서로이웃이 아니면 허용되지 않도록 바꾸어 버렸다.

나 역시 몇 년간 읽던 그녀의 글과 사진들이 어느 날엔가 몹시도 꼴보기 싫어졌다. 그 어디에서도 댓글을 허용하지 않고 있고, 단지 허용해둔 안부 게시판은 그마저도 서로 이웃이 아니면 글을 쓸 수 없도록 해둔 그것만으로도 정나미가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나는 그런 그녀와의 관계를 과감히 끊어냈다.


나는 작금의 스티밋에서의 분란 또한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믿는다. 이 같은 현상은 비단 이곳에서 만의 일도 아닐 뿐만 아니라, 고작 몇 개월에 걸쳐 나타나는 현상은 더더욱 아니다. 인간이 이 땅 위에 생존하기 시작한 이래 집단화를 시작하기 시점부터 언제나 있어 왔다.

안다. 모름지기 사람이 그렇다. 나와 비슷하다고 여겼거나 근본적으로 별다를 바 없는 인간들 사이에서 느낄 수 있는 무한히도 자연스러운 생각이고 현상이다. 이건 단지 나의 자존감이 낮은 이유로 상대와 나를 비교해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다. 인간이 판단하는 모든 것에는 내외적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상대와 경우에 따라서 달리 판단되는 것이 당연하다. 또한, ‘나’를 중심으로 내집단이 만들어지고, 속하지 않는 모든 상대는 자연스럽게 외집단이 된다. 사람이라면 그 누구에게나 나와 타인을 구분 짓는 집단화 과정을 거치고 타인 중 누군가를 포함하거나 배제하는 과정은 하루에도 몇 번씩 평생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당연히, 자타를 구분 짓고 집단화를 통한 소속감을 형성하는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때문에, 소속감을 획득하지 못한 사람은 소외감 내지 박탈감과 심지어 모멸감을 경험함으로써 극단적인 결과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소위,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따돌림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점에서 비롯되는데, 이런 것을 두고 내집단의 외현상화 반응이라고 한다. 자세한 설명은 이 글에서 다룰 것이 아니므로 넘어간다.

소위 그들만의 리그라고 불리는 그들 소속원들 모두가 꼴보기 싫어지는 것은 이 같은 인간의 내외집단을 형성하고자 하는 태생적 기질을 이해할 수 있다면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또한, ‘내집단’의 결속을 공고히 하고 자칫 폐쇄적인 성향을 띨 수 있는 것도 지당한 이야기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인의 반응일 뿐, 그들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실제로 살펴보아도 그렇다고 단정할만한 근거를 찾기가 쉽지 않거나 없는 경우가 있다. 이는 결국 버림받았거나 무시당한다는 박탈감에 근거해서 비롯되는 일종의 반항심리다. 그 원주율의 크기만큼이나 나와 저들의 경계는 더욱 두터워지고 오해의 씨앗은 날로 커져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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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확인하고 보다 나은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당신 덕분이다. '나'가 없는 '너'는 개념적으로도 추상적으로도 불가능하지 않는가 말이다. 그렇듯 우리는 다양성을 최고의 덕목으로 하는 민주주의 사회를 지켜왔고 앞으로도 계승 발전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할이며, 또한 그 유기적인 생태계야 말로 한걸음 더 진일보한 '나'를 확인케 할 것이라 믿어서 의심치 않는다.

인간의 갈등은 그리 대단한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도 아니고, 별다를 것 없는 사소함에서 불씨를 지핀다. 나와 당신 사이에서는 그 어떤 것도 다름이 없음을 알고, 또한 어느 하나 똑같음도 없이 다른 이유로 저마다의 삶을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오롯이 지켜낸 그들의 삶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성숙된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이 같은 일은 언제고 반복될 것이고, 남음 없는 상처뿐이다. 그 또한 우리를 오롯이 인간으로서 살게 하는 근본이며 바탕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어느 한쪽 일방의 잘못을 짚고 넘어가고자 하는 바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모든 이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지나간 일을 돌이켜 살펴봄으로써 저마다의 입장을 이해케 하고, 주변을 환기시키고자 함이다.


글 ; 우유에 퐁당
사진 ; unsplas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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