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제하기를 넘어서

오랜만에 아감벤의 호모사케르 연작 시리즈를 다시 훑어 봤다.

호모사케르는 고대 로마에서 비롯된 신성한 존재라는 본래 의미와 반대로 ‘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지만 죽여도 되는 생명’이다. 인간 법질서 외부에 머물러 있으며, 권리에는 배제 당하는 이중적 상황의 존재들이다. 그들을 죽여도 상관 없지만 완전히 인간 법질서를 떠나 신에게 제물로 바쳐지는 신의 질서로 편입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희생물로 바칠 수도 없다. 그들은 법질서의 외부에 있는 방식으로 법질서에 포함되어 있다. 그들은 엄연히 사회에 존재하지만 법질서 외부로 추방된 채, 무슨 일을 해도 상관없고 심지어 죽여도 무방한 존재이다. 아무런 권리 없이 단지 삶 그 자체만 가진 벌거벗은 생명, 권리에 배제된 채 권력에 포함되어 있는 존재, 이들이 호모 사케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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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외상태>에서 권력은 배제된 존재들의 공백을 만들며, 국가 권력의 법질서를 창출한다. 아감벤은 호모사케르를 주권에서 제외된 자들로 확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국가의 주권과 법질서의 넓은 범위에서 더 좁은 미시적 관계를 들여다 본다면, 사회 조직과 공통체는 특정 계층의 권위를 위하여 끊임 없이 권한의 외부 공백을 만든다. 이는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라는 존재의 명확함을 위해서 배제된 자들을 양산시켜야 한다. 나의 위치는 하위 계층의 존재에 의해 규정된다. 계층화로 생성되는 본질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보다 하잖은 존재, 내가 우위에 있기 위해서 언어로 규정짓기 되는 존재, 지식의 체계에서 열등하고 하등한 존재, 우리는 끊임없이 호모사케르를 만들어 낸다. 호모사케르의 존재는 이러한 우리의 상실된 욕망의 공백을 메꾸는 본질이다.

이러한 결정적 이유는 배제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권력에서 배제 당하는 권력자들, 권력으로부터의 수혜에 배제됨을 두려워하는 구성원들, 호모사케르를 비난함으로써 그들은 공백으로부터 힘을 얻는다. 어떤 공동체가 극단적으로 수직 체계화를 추구할 때 그 사회 이면에서는 두려움의 기제가 작동한다. 이러한 추동력은 개인의 윤리를 넘어서 집단 이익의 위험 즉, 악의 평범성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아감벤은 <아우슈비츠로부터 남은 것>에서 나치 유대인 학살을 관찰하며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계보학으로 기술한다. 아우슈비츠에서 권리는 박탈당하고 인간의 바닥에서 학살 당했던 유대인들의 수용소 내부에서도 호모사케르는 존재했다. 수용된 유대인 중에서도 병든 자, 힘 없는 자, 아이들, 노인들, 중동인들은 이슬람(실제 이슬람은 아니다) 명칭으로 배제된 자들이었다. 바닥에서 더 바닥으로 떨어진, 비인간 취급에서 비인간인 존재들이었다. 아우슈비츠 이후 재정된 세계인권선언은 보편성을 지니지만, 인간으로 선언되지 않은 이들은 법 권리 조차 박탈당한 예외적 존재이다. 인권은 어떠한 개인에게 무한하게 주워진다고 선언됐지만,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는 이들에게 인권은 유명무실한 것이 현실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인권 개념을 이러한 논리로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꽤 많다.

이렇듯 예외상태에서 상위권력과 호모사케르는 수직적 관계에서 쌍대성을 이룬다. 아감벤의 논의를 넘어서 호모사케르가 예외적인 배제된 상태에서 해방된다면 어떨까?

권리에서 배제된 자들이 권리를 갖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지만 죽여도 되는 생명’이 '희생물로 바칠 수 있고, 살아 있는 생명'으로 바뀐다. 주권의 신성함에 소속되어 있고, 살아 있는 생명으로 공백을 채우는 존재가 된다. 실제로 구원의 역사는 호모사케르가 해방되는 혁명의 역사였다. 혁명 이후에 호모사케르는 여전히 국가 권력에 의해 창출됐지만, 그 영역은 축소되어 인권의 범주는 넓어졌다. 국가 권력이 인민의 주권을 독점하는 모순된 현 체제에서 호모사케르의 해방은 개개인의 주권이 회복되는, 진정으로 개인에게 주워진 주권 행사가 가능한 시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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