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라 모르겠다

#1
컨디션이 안 좋다. 감기 걸리기 직전의 느낌이다. 주말 내내 날이 꽤 쌀쌀하던데 여기저기 돌아다녀서 그런가보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무리한 일정이었다. 5월이 되니 주말마다 결혼식으로 스케줄이 터져나간다. 몇 탕 씩 뛰어야하기도 한다. 다들 봄의 신랑 신부가 되고 싶어하나보다. 난 아무리 그래도 5월에 결혼하고 싶지 않다. 그렇지 않아도 5월은 가정의 달이어서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등으로 바쁜데, 결혼식까지 겹치면 더 정신없을 거 같다. 나를 위해서도, 내 가족을 위해서도, 내 지인들을 위해서도 이건 아니다. 5월은 패스.

#2
생각해보니 결혼식을 여러 개 참석한 것 보다 골프치러 간다고 꼭두새벽에 일어난 게 내 컨디션 악화에 크게 일조한 것 같다. 최근 몇달간 바쁘다는 핑계로 멤버들이랑 필드에 못 나갔더니 원성이 자자했다. 그래서 이번엔 꼭 가려고 기를 쓰고 일어났다. 오랜만에 잔디를 밟으니 두근두근했다. 날이 좀 안 좋긴 하지만 뭐…

#3
그런데 괜히 갔다. 내가 제일 못 쳤다. 연습을 너무 안 했더니 전부 다 엉망이다. 지는 느낌 너무 싫다. 멤버들이 다 비웃으면서 연습 좀 하라고 했다. 다음번에 치러 올 때는 반드시 나 혼자 의기양양하게 웃을거라고 큰 소리쳤다. 이제부터는 주말마다 특훈할거다.

#4
그래도 클럽하우스에서 오랜만에 먹는 고등어소바는 여전히 맛있었다. 예전엔 엄마랑 이거먹으러 자주 왔었는데.. 너무 바쁘다. 나도 엄마도.

#5
어떤 걸 보고 예전에 입사하기 전에 했던 수많은 인터뷰가 생각났다. 그때 정말 열심히 준비했다. 내가 아는 인맥을 총동원해서 지원한 회사에 다니는 선배들을 만나 mock 인터뷰를 수도 없이 봤다. 그리고 나를 직접적으로 잘 아는 선배들한테 internal referral 도 많이 받았다. 다른 사람들 얘길 들어보면 준비과정이 토나올정도로 힘들었다고 하는데, 나는 그 과정이 정말 신났다. 친했던 선배들 만나서 역할극하듯이 interviewer-interviewee 로 mock 인터뷰 하는 것도 재미있었고, 그 선배들이 소개하는 현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여럿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실제 인터뷰는 더더욱 재미있었다. 분명 지원자를 정신적으로 압박하는 분위기에서 인터뷰가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는데, 실제로 가보니 다들 기본적으로 나한테 호의적이어서 편하게 인터뷰 볼 수 있었다. 이렇게 편한 사람들이랑 같이 일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가장 가고 싶었던곳에서 합격 통지가 와서 정말 기뻤다. 그런데 결국 내가 가장 가고 싶었던 A 가 아닌 가장 명성이 높은 B 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B 는 회사 & 부서분위기가 너무 나 잘났어 하는 분위기여서 마지막까지 갈까말까 고민했는데, 네임밸류에 결국 넘어갔다. 그런데 막상가서 보니 나랑 B 회사랑 의외로 잘 맞았다. B 회사 입장에서 날 인터뷰 했을 때 나도 one of them 인게 보였나보다. (…) 그 때의 내 결정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아주 가끔은 상상해본다. 내가 B 가 아닌 A 에 갔으면 어땠을까.. 뭐 그래도 지금의 내 모습에는 큰 변화가 없을거다. 여전히 난 지금 이 모습일거다.

#6
If 라는 단어를 별로 안 좋아한다. 어차피 결정은 내려졌고, 나는 그 결정이 낳은 결과에 책임져야 한다. 구질구질하게 “이랬더라면…” 하면서 선택하지 않은 길을 곱씹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렇게 단호하게 생각하는 나에게도 ' 이 선택을 안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 라고 생각하는 선택이 있다. 그걸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면서도 너무나 멍청했던 나를 탓하게 된다. 처음 겪은 실패였다. 그 실패를 겪고 나서야 내가 실패한 적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실패에 흔들리는 내가 너무 불쌍했다.

#7
아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 선택이 아니라, 그 선택을 낳은 그 전 선택이 문제다.
아니네, 그 전 전 선택이 문제였네.
아닌가? 그 전 전 전 선택이 문제였나…?
모르겠다.
그냥 나 자체가 문제일수도.

#8
여기까지 쓰고났더니 몸살기운이 강하게 올라왔다. 약 먹고 잤다. 그리고나서 3일이 지난 지금 마저 쓰고 올리려하니 뭘 쓰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기억이 안난다. (…) 에라 모르겠다.

#9
요즘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들> 을 읽고 있다. 사실 읽은 지 한참 되었는데도 다 못 읽었다. (...) 그래도 책 속에서 기억나는 구절이 있어서 공유하고자 한다.

화가 크람스코이의 <관조하는 사람> 이라는 뛰어난 그림이 있다. 겨울 숲을 묘사한 그림으로, 그 숲속에 길 잃은 작은 몸집의 농부가 다 해진 카프탄을 입고 짚신을 신은 모습으로 홀로 깊은 고독 속에 서 있다. 그는 그렇게 서서 생각에 잠긴 것 같지만 사실 어떤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그저 멍하니 뭔가를 ‘관조’ 하는 것이다. 만약 그를 툭 친다면 그는 흠칫 놀라 마치 잠에서 깬 것처럼 어리둥절해서 바라볼 것이다. 그는 곧 제정신을 차리겠지만 그렇게 서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거의 아무것도 기억해내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관조 중에 받은 인상은 그의 가슴 속 깊은 곳에 간직될 것이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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