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라면

매일 밤마다 이 시간이면 찾아오는 불청객 허기
나는 또 참지 못하고 라면을 하나 끓여서 먹고 있다. 이러다가 날씬한 내 모습은 영원히 못 보겠군. 나 자신을 책망하며 계속해서 라면을 먹다가 문득 처음 라면을 먹은 게 언제인지 생각해보았다. 워낙 충격적인 사건이라서 머릿속에 뚜렷하게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일 때 일과처럼 학교가 끝나면 항상 노는 친구들끼리 모여서 신발주머니를 돌리며 게임기가 있는 친구네 집으로 갔었다. 게임기도 재밌고 좋았지만 항상 과일이며 과자 등 간식을 챙겨주던 인심 좋은 친구 어머님 때문에 더 자주 갔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날은 친구 어머님께서 간식을 준비 못했다며 라면을 먹자고 주방으로 우리들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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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으로 가서 식탁에 앉으니 각자 앞으로 네모나게 생긴 도시락 컵라면을 나눠주었다. 나는 그전까지 라면을 먹어본 적도 없었고, 컵라면은 더욱더 없었다. 내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포장을 뜯고 뜨거운 물을 받으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음식이었지만 신기한 과자 종류라고 생각하고 친구들을 따라서 눈치껏 행동했다.

컵라면에 뜨거운 물이 부어지고 기다리는 3분 동안... 슬며시 흘러나오는 맛있는 냄새 때문에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계속해서 뚜껑을 열어봤다. 친구들이 그러면 안 된다고 친절하게 알려줬지만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익어가는 라면을 구경하고 있을 때 어느새 3분이 흘렀는지 친구들이 젓가락으로 라면을 먹기 시작하자, 나도 따라서 라면을 입에 넣었다.

뚜껑을 열어 놨으니 라면이 잘 익었을 리가 있나... 덜 익은 면발 때문에 과자처럼 씹히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원래 그런 건 줄 알았고 너무나 맛있어서 뜨거운 면을 후후 불면서 누구보다 열심히 라면을 먹었다. 면발을 다 먹고 나서 남은 국물을 보며 이건 버리는 건가 했을 때, 친구 어머님께서 식은 밥을 가지고 오셨고 역시나 친구들은 능숙하게 식은 밥을 라면 국물에 말아서 먹었다. 나 또한 금방 따라서 밥을 말아먹었다. 그 맛 역시 지금까지 먹어본 요리 중에 최고였다.

빵빵해진 배를 부여잡고 행복하게 낮잠을 잔 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을 준비하고 계시는 엄마를 바라보며 "다녀왔습니다."라고 꾸벅 인사를 하고 저녁으로 라면을 먹자고 엄마를 졸랐다. 하지만 엄마는 단호하게 안된다면서 나를 꾸짖었다. 우리 집 형편이 많이 안 좋았던 때라서 라면이 비싼 음식이라고 생각하고 더 이상 엄마를 조르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엄마는 기름진 음식들을 싫어하셔서 라면 또한 싫어하셨고 동생과 나에게 건강한 음식만 먹이고 싶어 하셨다.

그렇게 집에서 먹는 라면은 포기하고 가끔 친구 집에서 먹는 라면과 학교 앞 문구점에서 종이컵 한 컵에 100원에 파는 라면을 먹으며 만족해하고 있을 때 IMF.. 외환위기가 찾아왔다. 그때는 몰랐지만 작게나마 개인적으로 건축업을 하고 계셨던 아버지에게도 어려움이 찾아왔었다. 뉴스에서는 연일 경제가 어렵다, 어떤 회사가 부도가 났다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지만 내 눈과 귀에는 마트에 라면이 동이 난다는 이야기만 들렸었고, 철없이 그 이야기를 부모님에게도 했었다.

다음날, 퇴근하시던 아버님께서 라면 한 박스를 양손에 들고 오셨다. 밖에서 일거리를 찾기 위해 고생하시다 돌아오신 아버님은 생각도 못하고 그저 집에서 못 먹던 라면이 한 박스나 생기자 좋다고 아버님께 넘겨받아서 낑낑대며 부엌으로 가져갔었다. 집 안 사정이 나빠져 라면을 먹는 것도 모르고 어린 나는 집 안에 자주 퍼져나가는 라면 냄새가 좋기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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