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북]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신용복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받은 신영복씨가 감옥에서 쓴 편지다. 편지의 대상은 아버지, 어머니, 동생, 형, 계수(제수) 등이  있다. 아쉽게도 가족들이 신용복씨에게 보낸 편지는 나오지 않고 신용복씨가 보낸 편지만 나와 심심한 감이 없지 않다. 좋게  말하자면 편지마다 독립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서 아무데나 펴서 읽기 시작할 수 있다.

 
중간중간에 한자어가 많이 쓰인다는 점 그리고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단어가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크게 읽기 어려운 부분은 없었다.


당시 시대적 풍조와는 다르게 여성을 주체로 인정하는 모습이 돋보인다. 사회적 연대를 하는 것과 동일한 입장에서 상대방을 바라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점은 자본주의에 찌들어 기계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나에게 일침을 가한다.
최근 정치인 김문수씨가 문재인 대통령이 신영복씨를 존경한다는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문재인 대통령이 김일성의 사상을 존경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p47. 그 자리에 땅을 파고 묻혀 죽고싶을 정도의 침통한 슬픔에 함몰되어 있더라도, 참으로 신비로운 것은 그처럼 침통한 슬픔이  지극히 사소한 기쁨에 의하여 위로된다는 사실이다. 큰 슬픔이 인내되고 극복되기 위해서 반드시 동일한 크기의 커다란 기쁨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작은 기쁨이 이룩해내는 엄청난 역할이 놀랍다.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 커다란  기쁨이 작은 슬픔으로 말미암아 그 전체가 무너져내리는 일은 아무래도 드물 것이라고 생각된다. 슬픔보다는 기쁨이 그 밀도가 높기  때문일까. 아니면 슬픔이든 기쁨이든 우리의 모든 정서는 우리의 생명에 봉사하도록 이미 소임이 주어져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p58. 과거를 회상하는 것은 미래를 창백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사실 요사이 나는 지난 일들을 자주 떠올리고, 또 그것들을  미화하는 짓을 자주 하는 편입니다. 과거가 가장 찬란하게 미화되는 곳이 아마 감옥일 것입니다. 감옥에는 과거가 각박한 사람이  드뭅니다. 감옥을 견디기 위한 자위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만 이 자위는 참혹한 환경에 놓인 생명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생명 운동 그  자체라고 생각됩니다.
p69. 이를테면 저와 형님과의 관계도, 다른 대부분의 형제들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거의 기계적이고 습관화된 대화에 의해서  형성되어 왔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경향은 비록 애정과 이해의 기초 위에서 비로소 가능한 하나의 미덕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창의와 노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별로 바람직한 것은 아니리라 믿습니다. 기계적이고 습관화된 대화는 인간관계의 정체를 가져오며  인간관계의 정체는 관계 그 자체의 퇴화를 가져오며 필경 양 당사자에게 오히려 부담과 질곡만을 안주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부부라는 가장 기본적인 관계에 있어서는 항상 의식적인 노력에 의해서 이것이 배제되어야 하리라 믿습니다.
p140. 지난번 새마을 연수교육 때 본 일입니다만, 지식이 너무 많아 가방 속에까지 담아와서 들려주던 안경 낀 교수의 강의가  무력하고 공소한 것임에 반해 빈 손의 작업복으로 그 흔한 졸업장 하나 없는 이가 전해주던 작은 사례담이 뼈 있는 이야기가 되던  기억이 지금도 선연합니다.

그런 교수가 될 뻔했던 제 자신을 아찔한 뉘우침으로 돌이켜봅니다.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찾아봅니다. 지식은 책 속이나 서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리된 경험과 실천 속에, 그것과의 통일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p313. 시대와 사회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각자의 처한 위치가 아무리 다르다 하더라도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더 많은  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어떤 대상에 대한 인식의 출발은 대상과 내가 이미 맺고 있는 관계의 발견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읽으면서 감탄할 때가 많았다. 지금의 나와 비슷한 나이에 감옥에 들어가서 20년을 산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인간 혹은 사회에  대한 통찰력을 가질 수 있을까 싶었다.  또한 이 책은 좋은 컨텐츠란 어떤 것이란 질문에 대한 모범 답안이다. 자극적인 제목이나  컨텐츠를 생산해내기보다는 가치있는 것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신영복씨는 편지에서 감옥에 있으면서 성장 혹은 변화를 겪었다는 언급을 했었는데 그에게 주어진 것은 감옥에서의 일과, 함께하는 감옥수들 그리고 책이다. '사람은 이토록 적은 요소들로도 성장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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