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의 인연과 《주역》


법정스님이 남기셨다고 전하는 다음의 글을 인터넷에서 자주 접하게 된다.


함부로 인연을 맺지 마라


함부로 인연을 맺지 마라.

진정한 인연과 스쳐가는 인연은 구분해서 인연을 맺어야 한다.


진정한 인연이라면 최선을 다해서 좋은 인연을 맺도록 노력하고,

스쳐가는 인연이라면 무심코 지나쳐버려야 한다.


그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헤프게 인연을 맺어놓으면,

쓸 만한 인연을 만나지 못하는 대신에 어설픈 인연만 만나게 되어

그들에 의해 삶이 침해되는 고통을 받아야 한다.


인연을 맺음에 너무 헤퍼서는 안 된다.

옷깃을 한번 스친 사람들까지 인연을 맺으려고 하는 것은

불필요한 소모적인 일이다.


수많은 사람들과 접촉하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지만,

인간적인 필요에서 접촉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주위에 몇몇 사람들에 불과하고,

그들만이라도 진실한 인연을 맺어놓으면 좋은 삶을 마련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진실은, 진실된 사람에게만 투자해야 한다.

그래야 그것이 좋은 일로 결실을 맺는다.

아무에게나 진실을 투자하는 건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내가 쥔 화투 패를

일방적으로 보여주는 것과 다름없는 어리석음이다.


우리는 인연을 맺음으로써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피해도 많이 당하는데,

대부분의 피해는

진실 없는 사람에게 진실을 쏟아 부은 대가로 받는 벌이다.


스님은 글에서 인연이라는 것은 함부로 맺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진실 역시 함부로 쏟아 붓지 말라고 하신다. 진실은 진실된 사람에게만 투자해야지 아무에게나 함부로 진실을 쏟으면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이 글이 인터넷에서 많이 회자되는 건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스님의 글에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스님의 말씀과 똑같은 취지의 가르침을 주역이 전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주역에는 ‘비인匪人’이라는 존재가 등장한다.

비인이란 ‘사람이 아닌 사람’을 말한다. 사람의 탈을 뒤집어쓴 짐승 같은 자를 이르는 말이다.

주역에는 이 비인이 여러 번 등장한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이런 사람 아닌 사람이 꽤 많다는 얘기다. 최소한 옛 점인占人들이 보기에는 그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들 비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주역은 “비인과는 말을 섞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친다(비否괘의 괘사).

아예 말을 섞지 말아야지 다른 어떤 시도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주역의 이 조언은 공자의 가르침을 생각하면 그 취지를 이해할 수 있다.

공자는,


“더불어 말을 나눌 만한 사람인데 더불어 말을 나누지 않으면 사람을 잃게 되고,

더불어 말을 나눌 만하지 않은 사람인데 더불어 말을 섞으면 할 말을 잃게 된다”

可與言而不與之言 失人

不可與言而與之言 失言

(《논어》 위령공衛靈公 7장 1절)


고 하셨다.


더불어 말을 나눌만하지 않은 사람이 바로 비인이다. 이런 비인과 더불어 말을 섞으면 결국 할 말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기가 막혀서…

이런 경험을 누구나 해 보지 않았을까?


그 때문에 주역은 사람이 아닌 사람한테는 아예 말을 섞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하는 것이다.

고대의 점인들이 봤을 때 방법이 없더라는 것이다. 사람이 아닌 저 놈을 내가 사람 한 번 만들어보겠다고 해봐야 결국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잃게 되는 상황을 당할 뿐이니, 아예 말을 섞지 않는 것이 최고의 대응책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공자는 주역을 가죽끈이 세 번 끊어지도록 읽었다는 ‘위편삼절韋編三絶’의 고사를 남겼다. 그렇게 해서 공자의 가르침이 나왔기 때문에 주역과 공자의 가르침이 일맥상통하는 것이며, 주역을 일러 유학의 최고 경전이라고 하는 것이다.


진실은 진실된 사람에게만 투자해야 한다는 법정스님의 조언 역시 일맥상통하고 있다.

진실 없는 ‘비인匪人’에게 진실을 쏟아 부으면, 그 대가로 삶의 기쁨을 맛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이 침해되는 고통과 피해를 당하게 되는 것이다.


주역은 이에 대해 “불리한 것은 군자가 정貞해서 크게 가고 작게 오는 것”(비否괘의 괘사)이라고 말한다.

“군자가 정貞하다“는 말은, 군자가 곧이곧대로 한다는 말이다.

상대가 비인인 줄을 알지 못하고 군자가 원래 하던 대로 자꾸 내주면, 내주는 것은 많은데 돌아오는 것은 별로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비인을 상대할 때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경계하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주역은 비인의 존재 여부를 기준으로 아예 상경과 하경을 크게 구분짓고 있다.

이는 주역이 이 세상에 두 세계가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기에 유의할 대목이다.


주역은 상경에 30가지 괘를 담고 있고 하경에 34가지 괘를 담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상·하경을 구분하는 기준이 바로 비인의 존재 여부이다.


상경은 비인이 출몰하는 세상이다. 상경의 세계에서 만나는 사람들 중에는 비인이 섞여 있는 것이다. 반면 하경의 세상에는 비인이 없다.

주역이 이처럼 비인의 존재 여부를 기준으로 자신의 체제를 둘로 나눠놓았다는 것은, 이 세상을 살아나갈 때 이 문제를 판단하는 것이 가장 기본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필자가 젊은 분들에게 주역을 기반으로 딱 한 가지 조언을 드린다면 역시 이 문제를 말씀드리고 싶다.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비인이 섞여 있는 상경의 세상에서는 의리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사람이 의리를 다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 의리는 하경의 세상에서 다하는 것이지 상경의 세상에서는 의리를 다해야 할 의무가 없다.


위에서 살펴본 법정스님의 조언을 주역의 용어로 옮겨보면, 비인이 출몰하는 상경의 세상에서 의리를 다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며, 상대방에게 내가 쥔 화투 패를 일방적으로 보여주는 것과 다름없는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했다가는 피해를 입을 것인데, 그 피해는 진실 없는 사람(비인)에게 진실을 쏟아 부은 대가로 받는 벌이라는 말씀이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세상을 살아나갈 때 크게 곤욕을 치르는 것이 바로 이 문제를 헷갈리는 경우가 아닌가 싶다.

상경의 세계, 비인이 섞여 있는 세계에서는 의리를 다할 의무가 없는데 의리를 다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크게 다칠 수가 있다.

비인일수록 이런 사람을 알아보고 이용하려 드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필자 역시 몇 번 곤욕을 치러본 경험이 있다.

그 때문에 필자는 주역이 상경과 하경을 이와 같은 기준으로 나눠놓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무릎을 쳤다. 아, 이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구나, 주역 역시 이 문제를 중요하다고 판단했구나, 내가 몰랐던 것이구나, 라는 느낌이었다.


요새는 흔히 ‘예의禮儀’라는 말을 하나의 개념처럼 쓰고 있지만, 예禮와 의儀는 서로 구분되는 개념이다.

의儀는 ‘거동, 의식儀式, 법식法式’ 등의 뜻을 갖는데, 사람의 올바른 행동거지를 의미한다.


이에 비해 예禮는 제단 앞에 음식을 풍성하게 차려 놓고 신에게 합당한 예를 다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글자로 ‘(신을)공경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즉 의儀는 외적인 행동거지의 문제인 데 비해, 예禮는 합당한 정성[誠]과 공경하는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


동양학의 용어로 말하면, 예禮는 ‘성誠’을 다해야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誠에 대해 오류를 무릅쓰고 간략하게 말하자면 ‘진실무망함을 다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므로 법정 스님께서 시에서 말씀하신 ‘진실’은 동양학의 ‘성誠’과 유사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예禮란 외적인 행동거지의 문제가 아니라 진실무망함을 다해야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의儀는 어디까지나 외적인 행동거지의 문제로서 서양의 에티켓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법정스님의 가르침에 비추어 살펴보면, 스쳐가는 인연에게는 의儀를 다하고, 진정한 인연에게는 예禮를 다할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진실은 예禮와 함께 다할 일이지, 의儀와 함께 다할 일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보면 주역에서 상경의 세계에 적용되는 질서는 의儀요, 하경의 세계에 적용되는 질서는 예禮라고 할 수 있다.

군자는 상경의 세계를 여행할 때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의儀를 다한다. 하지만 마음의 경계를 늦추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비인匪人이 섞여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군자는 상경의 세계에서도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그 관계는 아직 의리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라는 점을 안다. 그러므로 마음의 경계를 늦추지는 않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儀는 다함으로써 상대를 존중한다.


이처럼 《주역》은 의儀와 예禮를 구분해서 인식하고 있으며, 예禮의 질서에는 무거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주역의 내용을 보면, 사람 사이의 관계가 예禮의 적용을 받는 하경의 세계로 들어갈 때까지 거쳐야 되는 단계가 많으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이 정도면 예의 적용을 받는다고 인정할 법한데도 왠만해서는 허용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어렵게 형성되는 것이 예禮로 맺어진 관계(이자 의리로 맺어진 관계)인 이상, 그 관계가 한 번 맺어지면 이를 해소하는 것도 대단히 어렵게 여기는 것이 또한 주역의 태도이다.

이처럼 예禮의 질서에는 들어가기도 어렵고, 한 번 들어간 이상 나오기도 어렵다고 여기는 것이 다.


그래서 법정스님께서도 인연이라는 것은 함부로 맺는 것이 아니라고 경계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스님께서는 진실은 진실된 사람한테 쏟는 것이지, 진실 없는 사람에게 함부로 쏟아 부으면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게다가 그 피해는 내가 진실 없는 사람에게 진실을 쏟아 부은 대가로 받는 ‘벌’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다.


필자는 가르침의 취지에 100% 공감한다.

진실을 쏟는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게 쏟는 것이 아니며, 의리가 그리 쉽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의리가 요구될 때까지 거쳐야 되는 단계가 많은 것이고 아직 거기까지 가지 않았다면 내가 의리를 다해야 될 의무가 없는 것이다. 만약 그랬다가는 도리어 내가 위험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이 점에서 법정스님의 가르침과 주역의 가르침은 일치하고 있다.


필자는 처음에 두 가르침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랐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또한 당연한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근본적인 가르침은 모든 가르침이 결국 같을 것이다. 어찌 다르겠는가?


그러므로 필자는 좀 더 생각해본다.

<함부로 인연을 맺지 마라> 시는 스님의 다른 여러 가르침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가장 기본되는 가르침이 아닐까?

주역의 체제가 그러하기에 미루어 짐작해보는 것이다.


어쨌든 인생길을 걸어나갈 때 주의할 일이다.

인연은 함부로 맺는 것이 아니며, 진실은 함부로 쏟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무거운 것이기 때문이다.

의리 역시 그리 쉽게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무거운 것이기 때문이다.


동양학연구회(eastology.org)




  • 이 글은 연재 후 책으로 출판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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